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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교차로 라이프] 빵보다 술이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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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 증거로 보면 인류가 최초로 술을 양조한 시기는 9000년 전이지만, 인류 유전자의 알코올 분해효소를 보면 더 일찍 술을 마셨다. 처음엔 자연적으로 발효된 과일에서 우연히 알코올을 섭취했다. 그보다 더 일찍 술을 양조했을 가능성도 크다. 술의 원료는 벌꿀이다.

수만년 전 아프리카 초원의 원시인은 바오밥 나무와 미옴보 나무의 썩은 구멍에 만들어진 벌집에 비가 차서 만들어진 술을 마신 후 직접 벌꿀주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벌꿀 자체로는 당분의 농도가 너무 높아 술이 되기 어렵지만, 꿀과 물을 7:3 정도로 희석하면 과일보다 쉽게 발효가 된다.

프랑스 로셀 지역에서 발견된 2만년 전 암각화에도 여성이 뿔잔으로 벌꿀주를 마시는 듯한 모습이 담겨있다. 9000년 전 중국 지아후 유적의 술에도 벌꿀이 섞였다. 지금도 에티오피아와 우간다를 비롯한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벌꿀주를 만드는 전통이 남아 있다.

8000년 전 크레타 섬, 5000년 전 고대 인도, 3800~4800년 전 스코틀랜드에서도 벌꿀주를 양조했다. 플라톤은 그의 책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벌꿀주를 잘 만든다고 했다. 플라톤이 살았던 2500년 전 그리스에는 와인이 이미 일상화 돼 있었다.

‘허니문’(honeymoon)이라는 말은 16세기 중반 결혼 생활이 꿀처럼 달콤하길 기원하는 뜻에서 결혼 후 한달간 벌꿀주를 마셨던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전통에서 유래했다. 꿀은 달지만 발효된 벌꿀주는 달지 않다. 우리네 결혼 생활도 종종 이와 비슷하다.

벌꿀이나 포도는 단당류로 별도의 당화과정이 필요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술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곡류를 사용할 때는 당화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대인들은 곡물을 씹었다. 곡물을 씹어 술을 양조하는 전통은 안데스 지역(치차(Chicha) 술), 아마존 부족, 대만, 일본 오키나와,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 등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곡물을 익힌 후 씹으면 발효가 더 잘 된다. 불결해 보이지만 발효 후에는 위생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중 2016년 개봉된 ‘너의 이름은’이라는 작품이 있다. 산속 깊은 시골에 사는 무녀 가문의 장손녀인 여자 주인공과 도쿄에 사는 평범한 소년의 몸이 뒤바뀌며 일어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쌀밥을 씹어 술을 만드는 장면이 있다. ‘구작주’(口爵酒)로 불리는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다.

일본에선 3000년 전의 조몬시대 후기부터 이러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오키나와와 함께 아이누족에 아직 전통이 남아있다. 구작주는 7~8세기 간행된 일본의 ‘만엽집’(萬葉集)에도 그 제조법이 나온다. 영화의 주제도 만엽집에 나오는 시구를 모티브로 했다. 주로 젊은 처녀가 만든다고 하여 ‘미인주’(美人酒)로도 불렸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이 지은 ‘지봉유설’에도 미인주로 나온다. 삼국지 위서와 북서(北書)의 물길전에는 한때 고구려에 속했던 말갈족이 구작주를 빚었다는 기록이 있다. 말갈족은 와인도 양조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8000년 전 옥수수를 처음 재배한 것도 식용이 아니라 양조용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인류가 누룩과 맥아를 사용하면서 입으로 씹어 술을 만들던 방식은 점차 사라졌다. 중국에서 기록상 누룩과 맥아가 양조에 처음 사용된 때는 4000년 전 하나라 때이다.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맥아와 누룩의 사용법이 분리돼 누룩은 술의 양조에, 맥아는 단술이나 엿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우리말로 맥아를 칭하는 ‘엿기름’은 기름(oil)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기름’은 엿을 ‘기른다’는 뜻이다.

서양에서는 술의 양조에 누룩 대신 맥아가 주로 사용됐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8000~9000년 전 밀과 보리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밀과 보리를 재배하면서 빵보다 술을 먼저 만들었다. 1만2500년경 이 지역에서 야생 밀을 빻은 가루를 뭉쳐 빵처럼 만든 흔적이 발견됐지만, 지금의 빵과는 다르다. 현재와 비슷한 빵은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생겼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6200년 전 처음 맥아를 사용해 맥주를 양조했다. 3800년 전의 점토판에 새겨진 ‘닌카시의 찬가’라는 시에 구체적인 맥주 레시피가 나온다. 이를 보면 꿀과 대추야자를 넣어 만든 보리빵에 맥아와 물을 섞어 숙성했다. 맥주의 종류는 보리 맥주 8가지, 밀 맥주, 혼합곡 맥주, 이집트 수출용 맥주 등 20가지나 됐다. 국가가 노동자에게는 하루 2리터, 일반 공무원에게는 3리터, 고위 승려나 행정관에게는 5리터의 맥주를 지급했다.

“술집 여주인이 술값으로 곡물을 받지 않거나, 지나친 정도의 은전을 요구하거나, 치른 곡물에 비해 술을 적게 주면 물속에 던진다”(108조), “만약 여사제가 술집을 열거나 술을 마시러 술집에 들어가면 화형에 처한다”(110조). 3700년 전 함무라비 법전의 상법(88~111조) 편에 있는 술 관련 조항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급료를 맥주로 지급했다.

2018년 이스라엘 하이파대학과 스탠포드대학의 공동탐사팀이 이스라엘 북부 동굴에서 1만3700년 전 돌절구와 으깬 곡물의 발효 흔적을 발견했지만, 의도적인 양조의 증거로 보기는 힘들다.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서는 5400년 전 와인과 함께 맥주를 양조한 유적이 발견됐다. 북쪽으로 1700㎞ 떨어진 곳에는 8000년 전 비니페라 포도로 처음 와인을 양조한 기원지가 있다. 보리와 밀의 원산지도 자그로스 산맥 부근이다.

와인은 8000년 전 코카서스 산맥 남쪽에서 시작해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6000년 전에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 수출됐다. 반면에 맥주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해 거꾸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전파됐다. 와인과 맥주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술이다. 수천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대중적이었던 술도 맥주와 와인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이 지역은 대부분 이슬람 국가로, 와인과 맥주를 비롯한 술의 소비가 저조하다. 역사는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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