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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목사]

꿈을 고민하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어쩌면 내게 주어진 길이 시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내 백일장이 있었고 시를 썼는데, 장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쓴 시를 지금까지 기억하거나 보관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주제로 주어진 ‘가을’을 산문시로 썼던 것은 생각이 납니다. 

하지만 한창 예민하던 시절에 품은 푸릇푸릇한 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왕 그 길을 걸으려면 제대로 걸어야지 싶어 시집을 챙겨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집을 읽다 보니 아차 싶었습니다. 내가 쓴 것은 시가 아니구나 싶었지요. 아무렇게나 생각을 털어놓는다고, 그것을 짧은 줄에 담는다고 다 시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일러준 이가 김남조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시를 읽으니 생각이나 표현이 얼마나 단단하고 견고한지, 그러면서도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까마득한지,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버리고 남을 것으로만 남은 겨울나무 같았습니다. 그 겨울나무에 서리가 내려앉아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것 같았지요. 감정과 언어 어느 것 하나 느슨하거나 헤픈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시를 읽다 말고 먼 산을 바라본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서툰 시인의 길을 포기하고 시를 좋아하기로 마음먹게 한 가장 큰 계기는 그의 시였습니다.

<사랑초서> 앞에서 더욱 그랬습니다. 사랑에 대한 노래 중 그만한 노래가 없어 천의무봉이다 싶었습니다. 몇몇 시는 성경 구절 외운 듯 마음속을 걸어 다녔습니다. 좋아하는 그의 시를 다 말하기는 어려울 듯싶지만, 그래도 빠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남은 말’이라는 시입니다. ‘남은 말’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지구라는 것/ 도시 인간이 바라는 모든 지혜가 미워/ 축축한 산마루에/ 너 한 칸 이끼 낀 동굴이라면/ 내야 얼마나/ 한 마리의 어린 곰으로 살고 싶을까// 머리 수그려도 수그려도/ 못다 준 한 마디 말의 아픔>

언젠가 김남조 시인을 만나면 시와 관련하여 꼭 여쭤봐야지 싶은 것이 두어 가지 있었습니다. ‘남은 말’에 나오는 ‘도시’라는 말이 ‘도시都市’인지 ‘도대체’인지, <사랑초서> 15번이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나도 대답해/ 소름끼치며 처음 아는/ 영혼의 동맹’이 맞는지, ‘난생 처음 알게 된/ 영혼의 동맹’이 맞는지, ‘난생 처음 알게 된’이 맞더라도 ‘소름끼치며 처음 아는’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묻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지난 10월 10일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 마음을 먹었다면 여쭤볼 길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선뜻 나서는 용기와 숫기가 없던 탓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1,000여 편의 시가 이제는 김남조 시인이 남긴 ‘남은 말’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시 세계를 어찌 한두 마디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김남조 시인은 다르다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김남조 시인이 쓴 말도 사랑이요, 남긴 말도 사랑뿐이구나 싶습니다. 김남조 시인을 사랑의 시인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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